얼마 전 육지에서 손님이 와서 저녁을 먹기 위해 동네 식당에 갔다. 손님을 대접하려는 마음에 흑돼지를 주문했지만, 식당에서는 흑돼지가 다 떨어졌다고 했다.
사실 이 식당에는 메뉴에 흑돼지가 있지만 거의 갖다 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 고객층이 마을 주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주 동네 식당 중에는 흑돼지를 팔지 않는 곳이 꽤 많다.
제주 도민들은 대부분 흑돼지를 잘 먹지 않는다. 아니 못 먹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다. 비싸니 흑돼지가 아닌 백돼지만 먹는다.
관광객들은 제주까지 여행을 왔으니 제주 흑돼지를 사 먹을 수 있겠지만, 도민들은 비싼 흑돼지를 먹기에는 부담이 된다.
사실 흑돼지와 백돼지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는 미각도 한 몫한다. 맛을 잘 아는 미식가가 아닌 이상 일반인들은 껍질에 붙은 검은색 털을 보고 알지 먹어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요새는 속이는 식당이 많이 사라졌지만 2020년 이전에만 해도 백돼지나 수입산 돼지고기를 흑돼지로 속여 파는 식당도 있었다. 어떤 식당은 양념 백돼지를 섞기도 하고 백돼지의 껍질을 불로 까맣게 그을리기까지 했다.
모처럼만의 여행이니 관광객들이 흑돼지를 사 먹을 수는 있다. 다만, 흑돼지가 무조건 맛있고, 백돼지는 맛이 없다는 편견은 버릴 필요가 있다.
관광객들이 찾는 은갈치도 제주 도민들은 비싸서 잘 먹지 못한다. 한 마리에 4~5만원 하는 갈치를 저녁 반찬으로 먹는 도민을 거의 보지 못했다.
옥돔도 마찬가지다. 제주에서도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올릴 만큼 귀하고 비싼 생선이다. 도민들도 명절이나 제사를 지내야만 겨우 먹을 수 있다.
옥돔과 비슷한 옥두어라는 생선이 있다. 일반인들은 거의 구분을 하지 못한다. 당연히 옥두어가 싸다. 그래서 제주 식당 중에는 옥두어를 옥돔이라고 내놓는 곳도 많다.
정식이나 세트 메뉴 등에 나오는 옥돔처럼 보이는 생선은 대부분 옥두어라고 보면 된다. 한 마리에 몇만 원 하는 옥돔을 1~2만원짜리 정식에 내놓을 수는 없다.
육지에서 제주를 찾는 여행객들이 도민에게 물어보는 것이 '맛집'이다. 그런데 도민들은 유명한 맛집을 잘 가지 않는다.
유명한 맛집에 가면 몇십 분씩 웨이팅을 해야 하는데 바쁘게 사는 도민들이 그럴 시간이 있을까? 갈 수도 가지도 못한다.
흑돼지나 갈치, 옥돔은 모두 비싼 음식이다. 산지라고 저렴하지 않다. 제주 여행을 하면서 이런 음식들을 먹다 보면 여행 경비가 계획보다 초과될 수밖에 없다.
제주 여행을 하느니 그 경비로 동남아를 간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해외여행 대신 울며 겨자 먹기로 제주를 찾으니 비싸도 먹을 수밖에 없다.
2020년 제주관광공사가 발표한 방문관광객 실태 조사를 보면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의 33%가 '제주 음식 물가가 가성비가 나쁘며 타 지역 관광지의 음식 물가 대비 비싸다'고 평가했다. 특히 관광객들의 59.7%는 '제주도 음식 값이 비싸지만 가격 대비 맛도 없다'고 응답했다.
내국인 관광객들의 52%가 제주에서 '흑돼지'와 '갈치', '고기국수', '회'를 먹는 것으로 조사됐다.
관광객들이 주로 먹는 음식들은 도민들도 먹지 못하는 비싼 음식들이다. 가격은 비싼데 맛은 없으니 관광객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방송이나 블로그, 유튜브에서는 자극적인 영상과 비주얼을 위해 비싸고 화려한 음식만 소개한다. 그러다 보니 관광객들도 꼭 그런 음식들을 먹어야 여행 기분을 낼 수 있다고 착각한다.
여행 왔다고 비싼 음식들을 꼭 먹을 필요는 없다. 제주에는 저렴한 백돼지를 파는 식당도 있고, 한 끼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해장국집도 많다.
이제 여행 성수기이다. 해외여행 제한이 풀리지 않았으니 많은 관광객들이 제주를 찾을 것이다. 올여름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관광지 맛집'보다는 싸고 맛있는 가성비 좋은 동네 식당들을 방문하면 좋겠다.
제주 식당들도 비싸고 화려한 음식보다는 집밥처럼 싸고 정성이 깃든 메뉴들을 관광객들에게 선보였으면 어떨까 싶다.
2021년 여름에는 '제주에서 바가지 썼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관련기사
- [송당리에서] 아빠의 뽀뽀를 거부하는 딸의 당당한 용기
- [송당리에서] 제주에 사는 '육지 것'과 서울시민 원희룡
- '제주 흑돼지' 먹으러 왔다가 '미국산' 먹고 가지요
- 제주도 유명'맛집'? 속지 마세요.
- [송당리에서] 제주도 기름값이 비싼 이유는 뭘까?
- [송당리에서] 제주도는 '영어공화국'인가?
- [송당리에서] 제주 '한달 살기' 숙소, 사기꾼 거르는 법
- 제주에서 집 구하기 ① 모르면 사기당하는 '타운하우스'
- [송당리에서] 당신이 산 '제주 감귤'이 맛 없는 이유
- [송당리에서] 화물차의 1차로 주행이 위험한 이유
- [송당리에서] 제주 도로에서 만날 때마다 황당한 '이것'
- [송당리에서] 제주 도심에서 '야자수'를 볼 수 없다니
- [송당리에서] 제주에서 집 구하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 [송당리에서] 제주에 '노키즈존'이 많은 이유가 'OO' 때문?
- [송당리에서] '옥동 삼춘'은 왜 남편이 죽자 친구의 첩이 됐나
- [송당리에서] 송당리를 떠납니다.
